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레타 섬 전투 (문단 편집) == 전투 == 5월 20일 오전 8시를 기해 독일 공군의 [[Ju 52]] [[수송기]]들이 말레메 비행장 주변에 나타났고 비행장 및 주변 마을 등지로 수송기들이 착륙하거나 팔시름예거들이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독일 공수부대 역사상 최악의 날'''이 찾아왔다. 말레메 비행장 및 주변 지역은 영국군도 핵심 침공예상지역으로 선정하여 영국군 예하 육군 21, 22, 23 [[뉴질랜드]] [[대대]]가 집중배치되어 다수의 [[QF 3.7인치 대공포]] 등으로 철저하게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독일 공군의 실수로 인해 비행장에 선제 공습을 가한 지 한참 후에 공수부대가 투입되는 타이밍 미스까지 터지는 바람에 수비대가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참고로 당연히 이를 모른 독일 수송기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야간작전]]도 아니고 [[마켓 가든 작전|주간작전]]'''에 공수부대를 투하하기 시작한다. 눈에 잘 보이는 공수부대는 수비대 입장에선 하늘에서 떨어지는 좋은 사격훈련용 표적지였고, [[노르웨이 침공|노르웨이]]에서 했던 것처럼 강행착륙하는 수송기들은 영국군의 집중사격의 대상일 뿐이었다.[* 위의 영국군의 준비에 대한 서술 문단에 간단하게만 서술되어있지만, 에니그마의 해독으로 인해서 사전에 이 작전을 알았던 점이 그리스측의 크레타 초기 방어 성공에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거기에 독일군이 비효율적인 낙하산을 사용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낙하산의 문제로 인해 빈약한 무장으로 공수된 팔시름예거들은 작전 단 한 시간 만에 이미 사상자수가 수백 명에 달했고, 제1돌격연대 예하 어느 [[중대(군대)|중대]]는 중대정원 126명 중 112명이 전사, 사실상 전멸을 넘어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단 하루 만에 병력 600명 중 400명이 죽은 대대도 있었다. 단순히 큰 피해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단위부대 전멸에 가까운 피해가 속출한 것이다. 독일군 공수부대 제2파가 들이닥친 이라클리온도 다를 바 없었다. 오후 4시 15분을 기해 시작된 이라클리온 공수작전도 영국/호주/그리스 연합부대의 거센 방어에 직면했다. 화력이 가장 부족한 그리스 육군 담당지역을 돌파하는가 싶었지만 곧 예비부대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독일군은 비행장 한켠에 확보한 약간의 교두보에 몰려있는 상태에서 절망적인 첫 날을 보내야했다. 공군 폭격기들이 SOS를 받고 대대적 폭격에 나섰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거기다 독일 공군이 간신히 점거하나 싶던 일부 마을과 도시에서도 반독 폭동이 일어나 시민들이 구식 소총 같은 무기로 팔시름예거들을 무참히 학살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시민들에게까지 공수부대가 당하는 이유는, 당시 독일의 기술적 문제로 인해 공수부대는 낙하산으로 강하할 경우 '''[[권총]] 외에는 무기를 휴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장 낙하산 방향도 두 팔을 허우적거려야 간신히 조정하는 상태였는지라... 그래서 [[소총]] 등 다른 무기와 여분의 탄약은 따로 상자에 넣어서 낙하산 투하를 했는데, 이 상자들이 적진 한가운데 떨어지거나, 크레타의 험악한 산골짜기 깊숙이 박혀버리는 등 회수하기 참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냈고, 덕분에 무기를 회수하려다가 죽는 팔시름예거 부대원들이 많았고,적 민병대가 가져가는 경우도 많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rman_prisoners_under_British_guard.jpg|width=600]] 전투 첫 날을 요약하는 사진. 줄줄이 잡힌 독일군 팔시름예거 포로들이 보인다. 그나마 이 사진 속 주인공들은 운이 좋았던 케이스고, 대부분의 독일군 팔시름예거들은 전투 첫날 그야말로 [[화형]] 등을 당해 끔살당한 통에 이보다 더 당일의 모습을 잘 설명해주는 사진들은 다 끔찍하거나 혐오스런 사진들이다. 이처럼 전투 첫 날 이미 상황은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중부의 말레메 비행장 인근의 107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유일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리고 이는 전투의 향방을 갈랐다. 이게 영국군으로서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인데. 107고지를 방어하던 뉴질랜드 대대가 본인들 외에는 모두 철수한줄 알고 고지를 버렸다. 만약 107고지를 사수했더라면, 독일군의 추가적인 공중강습을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부와 서부에서의 작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깨달은 슈투덴트 장군은 21일부터 제2파로 투입될 예정이던 육군 제5산악사단 병력과 수송기로 수송 가능한 모든 중화기를 모조리 말레메 비행장으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산악부대원들은 낙하산 강하가 아닌, 수송기가 착륙하자마자 측면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수송기는 바로 이륙해 이탈하는 식으로 투입되었다. 21일 오후가 되면 말레메 비행장이 승부처라는걸 모르는 양국 지휘관은 아무도 없었다. 독일군은 107고지를 발판으로 말레메 비행장을 점령했고 21일 오후에 단행된 뉴질랜드군의 탈환 작전은 탄약이 부족해진데다가 비전투손실을 무릅쓴 독일군의 증원강행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공수부대원들과 달리 산악부대원들은 자신의 병기와 군장을 고스란히 지니고 투입되었기에 영국군은 이전과 같은 이점을 누릴 수가 없었다. 같은 날 독일군의 호송선단을 [[영국 해군]]이 발견, 일방적인 공격 끝에 대다수의 수송선을 격침하고 몇 척 남지 않은 수송선을 저지했으나 다음날인 22일 영국 해군의 함포사격을 등에 업은 뉴질랜드군 마오리 대대의 말레메 비행장 야습이 실패하면서, 독일군은 모든 증원병력을 말레메로 돌리면서 말레메 교두보는 점점 단단해졌고, 독일군의 병력과 중화기도 빠르게 늘어만 갔다. 더군다나 독일군의 해상수송을 차단하려던 영국 해군 지중해 [[함대]]가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아 [[순양함]] 2척이 격침되는 등 큰 피해를 입는 등 악재가 계속되었다. 이때 입은 피해로 지중해 함대는 크레타 작전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23일이 되면서부터 독일군은 본격적으로 교두보를 확대해나가기 시작했고 공중수송도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영국군의 모든 시선이 독일군으로 쏠린 틈을 타 당시 이탈리아령이던 [[로도스 섬]]에서 소규모 부대가 크레타 섬 최동단 일대에 상륙, 제2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이로써 크레타 섬의 운명은 결정났으며 잔존 연합군은 모두 남부 항구지대로 기나긴 후퇴를 시작했다. 이들의 머리 위로는 이제는 익숙한 [[Ju 87]]이 무차별 폭격을 퍼붓는 중이었다. 전투는 영국군이 철수한 5월 31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철수하는 수송선단에 탑승한 병력도 수송선을 집중공격한 Ju 87 때문에 상당한 희생을 겪었다. 게다가 혼전의 와중에 철수연락을 받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철수에 실패한 5천여명의 연합군은 대부분 항복하고 극소수만이 남아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이들도 1941년이 끝나기 전에 모두 죽거나 항복했다. 크레타 섬을 완전히 장악한 독일군 팔시름예거들은 앞서 침공 초기 시민들에게 공격받거나 화형 등을 당해 살해당한 것을 잊지 않고 청야전술로 잔혹하게 복수해서 상당한 민간인 피해와 가옥 파괴 및 전소가 추가적으로 발생했다. [[http://blog.naver.com/pzkpfw3485/70188508371|팔시름예거의 콘도마리 학살사진 #]] 적군도 아닌 민간인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향해 무기들고 공격해오고, 자기들이 써야할 무기까지 탈취해서 저항을 해온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민간인도 일정 수준의 장비와 조직을 갖추면 [[준군사조직]]으로 인정받아서 [[교전권]]을 확보하는데다가, 침략국에게 공격당한 국가의 주민은 당연히 반항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민간인이 전투중 교전으로 인해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투 후에 민간인을 마을에서 끌어낸 후 제대로 된 재판 없이 현지에서 즉결총살한 것은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로 전쟁범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